<좋은아침73>배반의 가을



   
 

러시아 문호 알렉산데르 푸쉬킨(Aleksandr Sergeevich Pushkin)이 약관 38세로 요절한 것은 아내 나탈랴와 염문설이 있는 근위장교 단테스와 사내답지 못한 질투심 때문에 벌인 결투 때문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최근 나온 푸쉬킨 전기에서 색다른 주장이 제기돼 새삼 관심을 끈다.

역시 푸쉬킨의 아내를 탐내던 러시아 황제와 근위장교의 양아버지 중 어떤 사람이 황제와의 염문설을 담은 편지를 일부러 뿌려 푸쉬킨을 극도의 정서불안 상태로 몰라 결투에 나서게 했다는, 치밀한 심리작전의 결과라는 음모설을 제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푸쉬킨은 ‘가을’이라는 시에서 가을에 스며드는 불안을 “멀리서 위협하는/백발의 겨울” 이라고 표현했는데, 그때 벌써 자신의 목을 죄어오는 어떤 음모를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비록 ‘백발의 겨울’을 눈 앞에 두고는 있지만 푸쉬킨은 “그래도 친근한 독자여 내겐 가을이 좋다”며, 자신이 가을의 시인임을 시 ‘가을’을 통해 만천하에 알리고 있다.

푸쉬킨은 봄을 끓는 피를 방황하게 하고, 해빙이 되면 쏟아지는 악취와 진창이 나를 병들게 하기 때문에 싫고, 여름은 더위와 먼지, 모기나 파리만 아니라면 좋아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 푸쉬킨은 가을에게만은 “우울한 계절! 내 눈을 끈다/이별의 아름다움이 나를 매혹하고/오 자연의 시들음이여/붉고 노란 색에 덮인 숲/바닷소리 신선한 호흡…”을 노래하며 ‘허영없는 예찬’을 보냈다.

사계절이 있는 우리네 풍경도 마찬가지다. 높은 하늘은 더욱 푸르고 들녘은 황금빛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처서가 지났고, 풍성한 수확에 이슬을 머금게 하는 백로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우리도 푸쉬킨의 계절에 들어서게 분명하다. 푸쉬킨이 아니더라도 허영없는 가을 예찬이 절로 나올법한 때다.

그러나 자연은 이럴진데 세상사는 전혀 볼 품이 없으니 어쩐 일인가. 세계태권도 본부를 자임하는 국기원이 상식을 벗어난 임직원 해고로 송사에 휘말리며 스스로 권위를 실추시킨 것도 모자라 소송비용으로 예산까지 낭비하고, 이사장과 원장이 번갈아가며 악수에 패착에 실정을 해대니 참으로 한심지경이다. 

이 뿐인가. 대한태권도협회도 내년초 회장선거를 앞두고 수장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나선 인물의 면면이 전과자에 협잡모리배에 파렴치한들 투성이니 기가 찰 노릇이다. 이런 일련의 예견된 사태가 태권도계에 암울한 가을을 짙게 드리우며, 또다른 배반과 음모의 계절을 불러오고 있음에야.

푸쉬킨은 “언덕 밑 덩굴에 송이송이 달린 채/잘 익은 포도알이 내겐 역시 정답다/비옥한 나의 골짜기에 펼쳐진 아름다운/황국의 가을이 보내 준 희열…”이라고 8월의 과실 ‘포도’를 노래하기도 했는데, 그러나 우리는 포도송이 같은 다정함, 오붓함이 없는 삭막한 가슴으로 가을을 맞고 있다.

‘가을이 보내 준 희열’은 없이 오히려 ‘멀리서 위협하는 백발의 겨울’이 뿜는 거치 숨결을 먼저 느껴야 하는 우리의 가을, 이런 딱한 노릇이 어디 있으랴. 더는 영욕을 탐하지 말고 푸쉬킨이 예찬한 그대로의 허영없는 가을을 맞이하면 오죽 좋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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