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河칼럼] 겨울 山만 같았으면
박완규 주필
진짜 갑오(甲午)년 새해 설날을 일주일 앞두고, 지친 육신과 어지러운 마음을 씻으려 눈 덮인 강원도 평창 백두대간으로 산행을 떠났다. 두터운 외투를 입었어도 옷깃을 여미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스산한 삭풍(朔風)이 매섭게 분다.
낙엽 위를 솜이불처럼 덮은 눈이 한낮 햇볕에 녹다가, 겨울 밤 찬바람에 다시 얼어붙는다. 그 위에 또 눈이 내리고, 녹고 얼고 여러 차례 반복되어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인 눈밭이 깊다. 바람받이 그늘에 쌓인 눈은 한 길을 넘어 대관령 목장 철책이 파묻혀 버렸다.
남으로 내달리는 백두정맥 등뼈 위는 바람과 눈이 빚어낸 추상화 전시장이다. 겹겹이 몰려오는 파도 형상의 눈 층을 지나, 너른 목초지를 뒤덮은 눈밭은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거대한 도화지다. 그 위로 배고픈 산짐승들의 발자국 행렬이 길다.
아기 고라니일까, 아니면 산토끼일까. 발자국이 깊지 않은 것을 보면 어린 짐승이 분명하다. 간격도 멀지 않은 작은 발자국들이 인절미 위에 막 눌러놓은 떡살 무늬처럼 예쁘다. 그 옆으로 종종걸음 친 산새들의 발자국은 무슨 형상의 문자인가.
떼지어 먹이를 찾아 나는 새들의 울음과 바람의 합창은 이 고즈넉한 겨울산이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래, 눈 이불 아래 낙엽 옷 속에는 겨울을 견디는 생명들이 있을테지,,,.
옷 벗은 나무들도 이 엄혹한 겨울을 참아내려고 서로 손을 맞잡거나, 혹은 어깨를 겯고 있다. 그러면서 모두가 하늘을 향해 솟구치려는 자세를 흐트리지 않는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잉잉거리는 소리는 아무리 추워도 꺾이지 말자는 결의와 다짐이려나.
소나무 잣나무 같은 상록수들은 이고 있는 눈 무게에 지쳐 보인다. 겨울 산이란 원래 그런 모습일 게다. 그럴진대 고갯마루에 서 있는 전파 중계시설 같은 구조물들이 태초부터 있어 온 겨울 산의 모습을 망쳐 놓았다는 생각이 든다.
선자령 정상에서 알코올 한 모금으로 언 속을 녹이고, 되돌아오는 길에 더 큰 부조화를 발견한다. 눈 위에 찍힌 내 발자국이다. 사람의 발자국은 왜 그리 크고 깊은가. 왜 그리 자연에 역행하는 모습인가.
내 일행과 낯 모를 겨울 산행자들의 발자국들은 또 왜 그리 어지러운가.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그토록 비자연적이란 걸 새삼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인간의 욕망은 끝도 한도 없이 자연의 숨통을 조르고 있다. 인간사란 늘 그렇다.
사람도 자연의 한 부분이어야 한다는 깨달음, 그래서 자연의 섭리에 순응해야 한다는 게 겨울 산행에서 얻은 값진 선물이건만, 혼탁한 사회로 회귀하는 발걸음은 왜 이리도 무거운가.
박근혜 정부가 정치적 압력으로 태권도계를 길들이려는 이 때, 표표히 대의적인 화합과 진정한 독립권을 행사할 수 있는 대승적 합의를 이끌어낼 태권도 지도자는 어디에도 없다. 오직 이 참에 기득권을 찬탈하려 모사와 협잡을 획책하는 추악한 인간들만 있을 뿐이다.
정치권력에의 기승이란 이름의 저들의 추잡한 언동일랑 겨울 찬바람으로 얼리고 사악한 마음까지 하얀 눈으로 덮어버릴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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