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칼럼>⑦ 지우책인명(至愚責人明)에 다름아닌 TV토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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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송나라 때 명재상 범중엄의 아들로 대를 이어 명신(名臣)으로 일컫는 범순인(范純仁)은 평소 자제들에게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남을 나무라는 데는 총명하고, 총명한 사람일지라도 자신을 용서하는 데는 어리석다. 너희들은 항상 남을 나무라는 마음으로 자신을 나무라고, 자신을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을 용서하도록 하여라. 이렇게 하면 성현의 지위에 이르지 못함을 근심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人雖至愚, 責人則明, 雖有聰明, 恕己則昏. 爾曹但常以責人之心責己, 恕己之心恕人, 不患不到聖賢地位也)"라고 가르쳤다.
송나라 때 주자(朱子)가 엮은 ‘송명신언행록(宋名臣言行錄)’에 실려있는 이 고사는, 우리의 수신서인 ‘’존심(存心) 편에도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된 지우책인명(至愚責人明)은 자신의 허물은 고치려 하지 않고 남의 허물만 들춰내 흉보는 것에 빗댄 말이다. 우리나라 속담 가운데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라는 말과 의미가 비슷하고, ‘숯이 검정 나무란다’는 말도 같은 말이다.
국민적 관심 속에 4일 열린 대선후보 첫 TV토론회는 한마디로 대선후보들의 생각과 차이를 제대로 확인하기 힘든 맥 빠진 토론이었다.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가 공격적으로 나가면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순발력 부족이란 한계를 드러냈고,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는 ‘박근혜-이정희’란 대립구도 속에서 존재감을 잃어 지지율 반등의 기회를 놓쳤다.
후보들이 각자 하고 싶은 말만 하다 보니 논점이 흐려지며 동문서답식 답변이 많았고, 상대방에 대한 네거티브가 주를 이루면서 정책토론회가 되지 못했다. 결국 1차 TV토론회는 박, 문 후보 모두에게 득이 되지 않는 토론이었고, 이후 토론회에 대한 기대감까지 사라지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모두가 패배한 토론이었다.
박 후보가 이 후보에게 시종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 차분하게 대응하긴 했지만 역동성과 순발력을 보여주지 못했고, 자신의 생각을 능숙하게 얘기하는 기술도 부족해 토론에 익숙하지 않은 한계를 드러냈다. 그나마 민생과 관련된 자신의 어젠다를 큰 틀에서 던지고, ‘진짜 평화, 가짜 평화’라는 프레임으로 자신의 대북 관을 차별성 있게 설명한 점이 눈에 띄었다.
반면 문 후보는 이 후보가 박 후보를 향해 워낙 강하게 나오면서 자신의 존재감이 사라져버렸다. 안철수 전 후보의 사퇴 이후 지지율 정체를 빚고 있는 그가 TV토론회를 반등의 기회로 삼았어야 했는데, 약간은 어눌한 인상에 날카로움이 없이 자신의 색깔이 전혀 부각되지 못했다. 정치변화와 관련해 꼼꼼하게 제안을 한 점이 그나마 위안거리다.
중요한 것은 안철수 변수가 사라진 대선에서 ‘이정희 변수’가 생길 가능성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앞으로 이정희 변수가 박 후보의 지지층을 결집시키고, 문 후보의 표를 갈라놓는 방향으로 작동할 것으로 보인다. 이 후보의 톤이 다른 공격적 질문에 박 후보가 차분하게 자기주장을 밝히면서 보수층의 결집을 유도한 반면 문 후보는 자신의 색깔을 전혀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후보가 문 후보에게 불리할 수 있는 외교안보 이슈에 대해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간접적으로 문 후보를 도와준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 후보는 박 후보를 비판할 때 대안을 함께 제시했어야 했다. 대안 없는 비판으로 그저 비난만 했다는 오해를 받을 수밖에 없는 한계를 드러냈다.
중요한 것은 안철수 변수가 사라진 대선에서 ‘이정희 변수’가 생길 가능성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앞으로 이정희 변수가 박 후보의 지지층을 결집시키고, 문 후보의 표를 갈라놓는 방향으로 작동할 것으로 보인다. 이 후보의 공격적 질문에 박 후보가 차분하게 자기주장을 밝히면서 보수층의 결집을 유도한 반면 문 후보는 자신의 색깔을 전혀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이번 토론은 후보 3인의 건설적인 정책 토론보다 입씨름 양상으로 흐르고 말았다는 점에서 토론 방식의 변화가 절실히 요구된다. 후보자가 각 분야의 정책과 공약을 유권자들에게 알리고, 상대후보의 공약에 대해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1대 1의 질문, 반론, 재질문, 재반론 등 구애됨이 없이 폭넓게 토론하는 등으로 후보자의 정책 및 능력에 대해 유권자가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질의내용에 대해 상대가 사실과 다르게 말하거나 잘못 말하여도 그냥 묻혀버리는 방식으로는 대선후보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검증하기 어렵다. 형평성 관리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느라 국민의 알권리는 보장되지 않고 더구나 정책도 없고 대안도 없는 비판과 인신공격만 해 대는 이런 지우책인명에 다름아닌 토론회 방식은 시급히 바뀌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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