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河칼럼> 겨울 산을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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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래 없는 폭염으로 시달렸던 여름이 지나고, 옷을 갈아입듯 변해가던 가을도 잠깐, 가을걷이가 끝난 겨울의 문턱이다. 갑자기 들이닥친 추위에 몸을 웅크리고 미끄러운 길을 피해 걷기가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다.
그러나 모이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대통령 후보에 관한 얘기로 열을 올린다.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인지, 자신이 원하는 후보를 고르기가 힘들어서인지, 선거운동에 나서보려고 그러는지…. 아무튼 인물론, 역할론, 예측, 상상, 주장, 희망 등이 모두 쏟아져 나온다.
얘기를 듣다가 한참을 멍하니 겨울 산을 올려다 본다. 저 산이 봄에 꽃을 피우고 무성한 여름의 초록을 만들고 가을을 지나 다시 이렇게 헐벗고 초라하고 볼품없이 앉아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대통령을 인물로 뽑을 수도 없고, 정책과 정당을 보고 뽑을 수도 없고, 기껏해야 한 표뿐인 나의 선택이 올바른 것일지에 대한 자신도 없어질 때쯤이면 다시 겨울 산을 바라본다.
저렇게 못나 보이는 산이 이제 봄이 되면 포근하고 정겹고 희망을 심어주고, 그러다 여름이 되면 싱그럽고 다소 위협적으로 변하겠지. 푸름을 거부하고 누렇게, 빨갛게 시들거리며 비틀어져가겠지. 눈에 보이는 겨울 산이 흉물스럽게 보이는 것은 변신의 계절, 가을을 지냈기 때문인가? 산은 언제나 그렇게 변해 왔었다.
선거도 시작과 끝이 있고, 그래서 후보를 선택하기 전과 선택된 후보가 변해 가는 모습이 낯설거나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속은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화려하게 보이던 저 산의 모습이 이렇게 달라져 있듯. 내가 선택한 후보가 또 나의 기대를 저버리고 실망과 분노의 이글거림을 경험하게 만들겠지. 그러나 나를 위한 정부가 아니고 온 국민의 기대와 바람으로 뽑힌 대통령이라면 누가 당선되든 축하하고 국민의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지 하면서 다짐을 해 본다. 그런데 누구를 선택해야 하나?
다시 겨울 산을 올려다본다. 점차 희미해져 가는 산 빛 속에서, 산의 형태가 보인다. 능선과 구릉. 그래 산의 모습이 정말 저렇게 생겼구나. 우습게도 새삼스럽게 산이 다시 보인다. 산은 산일 뿐이다. 그런데 겨울 산과 여름 산은 왜 그렇게 달라 보이는가? 이성적으로 눈에 보이는 산을 바라보면, 저 산은 형편없다. 그런데 나의 경험을 되살려보면, 저 산은 푸름과 위용을 지닐 수 있다. 그래서 지금 보이는 저 산의 모습을 여러 가지 산에 대한 경험으로 되짚어 본다.
한 사람을 선택하기 위해선 지금의 모습이 아니라 나에게 기억된 모든 모습들이 다 떠오른다. 누군가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잊을 수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인간은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삶을 택한다고 했다. 독일 철학자 칸트는 인간에겐 선험적 지식이 있고 배우지 않고도 원래부터 있었던 선험적 지식을 통해 대상을 이성적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했다. 지금 겨울 산 밑에서 이름을 떠올리는 사람들에 대한 기억은 없어졌을 수도 있다. 선험적 지식으로 누군가를 선택할 수도 있다. 나의 선택은 합리적인 결론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선택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그렇게 여러 번 투표를 해 봤지만, 정치에 대한 불신은 점점 커져갔다. 그래서 경험적 지식을 믿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아직까지 사람에 대한 기대와 믿음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겨울 산이 지금 이 모습 이대로가 아닐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덴마크의 왕자 햄릿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왕을 그냥 둘 것인지, 죽일 것인지 고민하고 주저하다가 결국 비극적인 죽음을 당한다. 누가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달라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 많아졌다. 겨울 산 아래에서 대통령 후보에 관해 떠들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다 햄릿처럼 비장해 보인다. 순간의 선택이 미래를 좌우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겨울 산은 저 냉랭한 모습 그대로, 우리의 선험적 지식을 비웃고 있다. 봄이 올 것이라는 기대와 여름 산에 대한 경험을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의 망각을 지켜보고 있다. 그래서 겨울 산은 말이 없다. 사람들은 참 많은 말을 한다. 믿을 수 없는 얘기도 많다. 저 산처럼 보이는 후보가 있다면 참 좋겠다. 저 산은 가을을 지나 지금 저 모습으로 앉아 있지만, 봄을 알려줄 것이고, 여름의 장엄함을 다시 경험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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