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아침63> 가을 서정



   
 

아직 한낮 햇살이 따갑지만, 가을 기운이 천지에 가득하다. 바람결의 맛이 다르고 햇살의 느낌이 어제의 것이 아니다. 여름 날씨에 지친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해주는 청량(淸凉)한 가을 기운이 스며든다. 인간도 자연 속 한 존재이니 그 기운 앞에 어찌할 수 있겠는가.

법정 스님은 ‘산에 살면서 철이 바뀔 때마다 느끼는 일인데, 계절의 변화는 바람결에서 시작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그때에 맞추어 바람을 타고 오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가을의 바람결이 내는 소리는 ‘서걱이는 마른 바람소리’라 했다.

온 천지에 가을 기운이 가득하지만, 자연 곁으로 가면 가을을 더 직접적이고 진하게 느낄 수 있다. 원주 남한강변에 나가봤다. 잔잔한 물결에 수풀과 산 그림자가 비친 모습이 새롭다. 문득 여름날 보던 것과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그때의 물빛이 아니었다. 한가롭게 헤엄치는 오리들이 그려내는 물결 무늬가 너무나 한가롭다. 백로 역시 그동안 수시로 보았던 모습 그대로인데도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강물을 바라보며 걷는 아주머니도 가을 분위기에 도취된 듯 보였다. 모두 가을 기운 덕분이다.

작은 꽃을 활짝 피운 길가의 코스모스를 보니 기분이 약간 들뜨기 시작했다. 그 기분은 가을 노래로 흘러나왔다.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있는 길/ 향기로운 가을길을 걸어갑니다/ 기다리는 마음같이 초조하여라….’ ‘내몸이 떨어져서 어디로 가나/ 지나온 긴 여름이 아쉬웁지만/ 바람이 나를 몰고 멀리 가며는/ 가지에 맺은 정이 식어만 가네….’ 가을 기운으로 심신(心身)이 씻기면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아름답게 다가오는 모양이다.

출근 길에서 늘상 보던, 길가에서 좌판을 깔고 과일을 정리하는 아주머니의 모습이 각별히 아름답게 보인다. 여름날에 보던 느낌과 다르다. 왜 그럴까. 가을의 힘, 자연의 힘 덕분이라는 생각이다. 정성을 다하는 그 아줌마의 일하는 모습 자체도 아름답지만, 그 모습을 보는 내 마음에 여유가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마음상태가 되지 않으면 그 아름다움도 보지 못하는 법이다.

이런 가을 기운인 만큼, 모두가 만끽할 일이다. 사람의 마음을 맑고 차분하게 하는 가을 기운에 흠뻑 빠져, 여름날 동안 지배했던 무겁고 끈적한 기운을 씻어버리자. 그래서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고 주변의 모든 이들이 정겹고 사랑스러워 보이도록 하는 힘으로 충전할 일이다. 가을 기운을 만끽하는데는 돈이나 시간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다. 그냥 잠시 마음을 비우면 된다.

고마운 가을을 맞으며 언젠가 모두 우려하는 지구 온난화로 이 땅의 사계절 순리가 깨어지지 않을까, 그래서 이 좋은 가을 기운을 제대로 못 누리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좋은 순간이면 간혹 쓸데 없는 기우(杞憂)를 하게 되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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