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아침㉗>포도알로 영근 詩



   
 

작은 시집을 한권 얻었다.
‘자주 내리는 비는 소녀 이빨처럼 희다’. 포도농사를 짓는 시인의 것이라 했다.

‘포도알이 이빨 빠진 것처럼/ 빠져나간 자리/ 낮에는 해, 밤에는 달이/ 교대로 박혀있다./……/ 나는 해 하나 따먹는다./달 하나 또 따먹는다./ 그때부터 하늘은/ 눈을 감고/ 그 파도의 몸짓만/ 생각하고 있었다.’
무심코 입으로 가져가는 포도알이 시라는 걸 새삼 일깨워준다.
 
책날개에 보니 시인 류기봉은 남양주 장현에서 포도농사를 짓는다. 아니다. 잘못 말했다. 남양주 장현에서 포도를 가꾸는 농부 류기봉은 시를 쓴다고 해야 맞다. 실은 ‘농부시인’도 괜한 꾸밈말이다.

농부는 원래 시인 아니던가. 류기봉의 포도시편들이 과즙원액 맛을 내는 이유를 알겠다. ‘포도는 음식입니다. … 음식이 아니라 문화포도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풀 한포기, 소, 돼지, 벌, 꽃, 사과나무가 문화가 되는 농사가 필요합니다.’ 그는 지난 98년부터 해마다 포도철에 ‘포도밭 문화행사’를 열고 있다고 한다.
 
그의 시와 산문은 포도나무와 진한 연애를 해본 사람만이 아는 포도의 비밀을 들려준다. 포도 한 알은 먹물빛으로 익기까지 수만가지 빛깔을 띤다. 그는 그 과정을 ‘세상과 만나기 위해 수십만 개의 립스틱을 고쳐 바르는 여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잎과 가지 뒤에서 수줍은 아가씨처럼 희미한 연노랑으로 피어나는 포도꽃도 가르쳐주고, 아침 6시에서 9시사이에 수확한 포도가 가장 맛있고 향기롭다는 상식도 귀띔해준다. 그는 포도의 눈물을 보았고, 중학생 아들녀석처럼 말안듣는 나무도 길들여냈다.
 
‘농민 류기봉은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농업 부적격자이기에 오늘 이후로/ 포도나무들과 함께 눈물을 제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2002년10월29일/ 대한민국정부’.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타결 소식에 ‘짠 눈물’을 흘렸던 그는 그래도 꿋꿋이 유기농 포도농사를 지으며 짬짬이 시를 써 시집을 냈다.

언제 그를 한번 만나 그의 詩세계를 들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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