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河칼럼>올림픽에 열광해서는 안되는 이유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 피에르 드 쿠베르탱은 올림픽을 통해 인류의 평화와 친선을 도모하였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새빨간 거짓말이다.

19세기 유럽 지식인의 전형이던 쿠베르탱은 백인 우월주의자였다. 그가 식민지에서 흑인종과 황인종을 데려다가 올림픽에 출전시킨 것은, 백인의 힘을 만천하에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백인 관중들은 그의 예상대로 미개 종족의 패배를 마음껏 조롱했다. 올림픽은 제국주의와 인종주의의 그늘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났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은 가관이었다. 히틀러 정권은 자국 정치체제를 선전하고, 독일 민족의 우월성을 입증하려고 날뛰었다. 우리가 필히 기억해야 할 점은 히틀러만 그랬던 게 아니라, 그가 유독 심했을 뿐이다. 그 독재자가 망한 뒤에도 올림픽은 여전히 체제 선전의 각축장이었다. 미국과 소련은 불꽃 튀는 경쟁을 벌였고, 나라마다 금메달 개수에 울고 웃었다. 인류 평화와는 거리가 먼 올림픽, 그것은 또 하나의 전쟁터다.

올림픽위원회가 허울뿐인 정치중립의 가치를 고집해 만민을 웃긴 적도 있었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때, 200m 달리기 우승자 토미 스미스와 3위 입상자 존 카를로스는 미국 사회의 흑인차별을 비판했다. 그러자 올림픽위원회는 올림픽정신을 훼손했다며 그들을 쫓아냈다. 약자에게만 한없이 강한 올림픽위원회 만세!

올림픽은 큰 볼거리다.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좋게만 봐줄 수가 없다. 상업주의의 폐단을 열거하기로 들면 끝이 없고, 겨울올림픽의 환경파괴 문제도 진즉에 도를 넘었다. 무자비한 빈민주택 철거와 마구잡이 재개발은 서울올림픽 때 목격한 바다.

예산 낭비도 심각하다. 올해 한국 정부는 런던에 선수단을 보낸다며 체육예산을 8634억원이나 책정하였다. 사회체육을 정착시킬 만한 거금이 아닌가. 그 돈으로 금메달 몇개 더 딴다고 무엇이 달라지나. 이제 올림픽 시청 거부운동이라도 벌여야 할 때다. 언필칭 금메달에 목매는 건 바보짓에 다름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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