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木食四季] ⑯ 까까머리 검정고무신의 추억을 부르는 대서(大暑)

청풍(淸風) 이기백 / 발행인

   
 

2012년 7월 22일 (음력 임진년 유월 초나흘)

24절기 중 열두 번째에 해당하는 절기인 소서(小署)와 입추(立秋) 사이에 든다. 대서(大暑)는 음력으로 6월에 있으며, 양력으로는 7월 23일 무렵에 듭니다. 태양의 황경이 대략 120도 지점을 통과할 때이다.

우리나라에서 이 시기는 대개 중복(中伏) 때로, 장마가 끝나고 더위가 가장 심하다. 예부터 대서에는 더위 때문에 “염소뿔도 녹는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이다.

여름의 토용(土用)은 이 계절에 들어간다. 토용이란 토왕용사(土王用事)의 준말로 토왕지절(土旺之節)의 첫날을 말한다. 토왕지절은 오행설(五行說)에서 토기(土氣)가 왕성하다는 절기이다.

사계절은 사립(四立, 입춘•입하•입추•입동)에서 시작하므로 사립 전의 18일간이 토에 배당되는데, 토왕용사에 태양은 각각 황도 위의 황경 27도, 117도, 207도, 297도의 위치에 온다.

오행설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태양의 황경에 기준을 둔 것이므로 계절의 변화와 일치한다. 특히 겨울의 토왕용사는 혹한(酷寒)의 시기이고, 여름의 토왕용사는 혹서(酷暑)의 시기이다. 이것을 각각 겨울의 토용, 여름의 토용이라고도 한다. 토왕용사에 흙일을 하면 해롭다는 속신(俗信)이 전해지기도 한다.

옛날 사람들은 대서 입기일(入氣日)로부터 입추까지의 기간을 5일씩 끊어서 삼후(三候)로 하였는데,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을 보면 대서는 6월 중기로 초후(初候)에는 썩은 풀에서 반딧불이 나오고, 차후(次候)에는 흙에 습기가 많으며 무덥고, 말후(末候)에는 큰 비가 때때로 온다고 하였다.

대서는 중복 무렵일 경우가 많으며 삼복더위를 피해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계곡이나 산정(山亭)을 찾아가 노는 풍습이 있다. 때때로 이 무렵 장마전선이 늦게까지 한반도에 동서로 걸쳐 있으면 큰 비가 내리기도 한다.

불볕더위, 찜통더위도 이때 겪게 된다. 무더위를 삼복으로 나누어 소서와 대서라는 큰 명칭으로 부른 것은 무더위에 대한 경각심을 깨우쳐 주기 위함이다.

이 무렵이 되면 농촌에서는 논밭의 김매기, 논밭두렁의 잡초베기, 퇴비장만 같은 농작물 관리에 쉴 틈이 없다. 또한 참외, 수박, 채소 등이 풍성하고 햇밀과 보리를 먹게 되는 시기로 과일은 이때가 가장 맛있다. 비가 너무 많이 오면 과일의 당도가 떨어지고, 가물면 과일 맛이 난다.

바지게에다 풀을 짊어지고 짐승들의 먹이를 장만하고 또 모깃불을 놓기도 한다. 반딧불이 밤하늘을 수놓고 모깃불 옆 평상에서 한 여름 밤이 깊어간다.

옛적에는 부채도 귀했던지라 두꺼운 비닐로 된 비료 푸대를 잘라서 주름을 잡고 한쪽 끝을 묶어 손잡이를 만들어 부채질을 했었다. 그래도 못 참으면 등목을 하기도 하면서 수박이나 참외를 깨물기도 했다.

방학에 들어간 아이들은 천지로 쏘다니며 천렵을 하고 개천이나 저수지에서 무자수(물뱀)랑 헤엄을 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깔(꼴)을 베어서 서로 따먹기도 했다.

꼴을 벤 낫을 거꾸로 들어 빙그르르 돌려서 던지면 그 낫이 바닥에 꽂히는데 기역자의 사이로 주먹을 넣어 무사히 통과하면 이기는 것이고 바닥에 패대기 처져서 찌그러지거나 각도가 낮으면 지는 것이다.

방학 내내 곤충채집에 열을 올리고 개학 때 학교에다 낼 건초도 장만한다. 천렵으로 잡은 먹장어를 고아먹기도 하고 호박 부처리를 지지기도 했다.

호박 꼭지를 버리지 않고 두었다가 솥두껑을 뒤집어 밑불을 때고는 콩기름을 두르고 호박꼭지(혹은 볏짚묶음)로 기름을 둘러서 부처리를 부쳐 먹었다.

무성하게 자라서 작은 가시들이 돋아난 큰 호박잎은 까칠한 면으로 갈치의 비늘을 씻을 때 썼으며 어린잎은 쪄서 쌈을 싸는데 간간한 조선장에 매운 고추 썰어서 양념한 장에다 먹었다.

낫질을 하다 베인 상처며 고무신을 신고 줄달음치다 신발에 물기가 들어가 발이 미끄러워 넘어져 생긴 상처는 봉초 담뱃가루나 쑥을 찧어서 발라주기도 했고 묵은 된장을 환부에 올려놓고 놋숫가락을 벌겋게 달궈 지져대면 된장의 짠 즙이 상처에 스며들어 소독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 화상을 입기도 했다.

어떤 아이들은 공곳이 나기도 하여 이명래 고약을 사서 입김으로 고약을 후 후 불어 부드럽게 한 후 가운데에 촉을 심어서 고약을 붙여 피고름을 빨아내기도 했다. 환부 깊숙이 박혀 잇는 덩어리가 빠지지 않아 어른들이 입으로 빨아서 뱉어내기도 했다.

빡빡머리에 부스럼이 나서 물약을 바르기도 했던 그 시절, 검정고무신 신고 바지게에 깔을 베어 간당거리며 내려오다 미끄러져 엎어져 꼬랑에 빠지기도 했던 그 시절…황순원 선생의 소나기에 그려졌던 그 풍경들과 같은 그 시절… 그 시절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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