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河칼럼>게으름의 미학-미네르바 올빼미는 황혼에 깃을 펼치거늘

청하(淸河) 박완규 / 편집인 겸 주필



   
 

무릇 세상은 ‘부지런함’이 미덕이라고 한다. 맞다. 미덕이다. 그러나 그 부지런함은 원시인의 미덕이고 노예의 미덕에 다름아니다.

예전엔 사람들이 뛰면서 생각했다. 원시인들은 맹수들에게 몰려 달아나면서 살 궁리를 했고, 노예들은 주인의 심부름으로 뛰면서 늦었을 경우에 일그러질 주인의 표정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러나 사람들은 문명의 이기를 접하면서 ‘뛰기’를 그만두었다.

노예로부터 해방되면서 ‘뛰면서 생각하기’를 마다했다. 인류의 문화는 게으름뱅이에 의해서 만들어져왔다. 부지런함이 문화를 낳을 수 없음은 수탉이 알을 낳을 수 없음과 같다. 지금도 아프리카의 고원지대에서는 먹고살기 위해서 하루 종일 뛰는 부족이 있다.

그들은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풀잎에 맺힌 이슬을 따느라고 부지런히 서둔다. 마실 물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창을 들고 짐승을 잡거나 열매를 따기 위해서 들판을 뛰어다닌다. 그들에게는 그러나 문화가 없다. 만일 그들이 게으름을 부리도록 자연이 베풀어준 밤과 잠이 없었다면 그들은 살아남지도 못했으리라. 예컨대 그들은 먹고살기에 바쁜나머지 문화를 만들 틈이 없었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에 깃을 펼친다. 지혜는 뛰기를 그만둔 순간부터 생긴다는 이야기다. 그리스의 문화는 게으름뱅이들의 문화였고, 할 일 없이 건들건들 걷는 사람들의 문화였다. 부지런한 사람에게는 한가할 틈이 없다.

걱정하고 슬퍼할 틈이 없으니 좋지 않냐고 이야기하지 마라. 생각할 틈도, 남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틈도 없다는 말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이 세상에 지혜를 가져다주고 빛을 가져다준 사람 가운데에 누가 부지런했느냐? 누가 뛰면서 생각했느냐?

소크라테스는 맨발로 시장 바닥을 빈둥거리며 게으름뱅이들과 환담을 하면서 산 사람이고, 석가는 제 손으로 자기가 먹을 양식을 거두어본 적이 없이 7년 씩이나 나무 밑에서 게으름을 만끽한 사람이고, 공자는 할 일 없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왕이나 고관대작들과 생산적이지 못한 이야기로 일생을 보낸 사람이며, 예수는 게으름을 피우기 위해서 목수 일을 그만둔 사람이다.

부지런함은 게으름의 미덕을 즐기기 위한 필요악이지, 그 자체가 미덕일 수는 없다. 하루에 여덟 시간씩 일하는 국민이 하루에 네 시간씩 닷새만 일하는 국민보다 더 앞선 민족이라고, 더 문화민족이라고 누가 그러더냐. 부지런함은 다만 사람다움에서 벗어나는 일일 뿐만 아니라 대자연의 섭리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대자연은 새에게 부리와 날개를, 들짐승들에게는 억센 이빨과 빠른 발을 주었으나, 사람에게는 말과 생각하는 힘을 주었다. 말은 생각과 함께 태어난 한배 자식이다. 생각이 담기지 않은 말은 지저귐이나 으르렁거림이고, 말로 엮이지 않은 생각은 막연한 느낌일 뿐이다. 말과 생각은 여유를 필요로 한다. 여유는 곧 게으름을 피울 틈을 말한다. 헐레벌떡 뛰어다니다가 저녁 무렵에 화롯불 곁에 모여 앉을 때에 비로소 말이 생기고 생각이 생기고 예술이 생기고 문화가 생긴다.

현대인의 비극은 게으름을 악덕이라고 생각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계몽기의 과똑똑이들이 서양의 역사에서 가장 게을렀던, 따라서 가장 평화롭고 복되었던 중세를 문화의 밤이라고 섣부른 진단을 내리고, 그 뒤에 산업혁명과 중상주의와 결탁하여 게으름을 악덕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서양에 새로운 야만시대가 시작되었다.

많은 사람을 탄광의 광부로, 공장의 직공으로, 막벌이꾼으로 부리기 위해서는 그들로부터 사람다움을 빼앗고 노예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사람에게서 사람다움을 뺏는 가장 빠른 길은 그들에게서 게으름을 부릴 틈을 빼앗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에게서 게으름을 추방하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다.

공장을 세웠고, 신문을 만들어냈고, 전기를 만들어 밤을 추방했고, 각종 오락시설이라는 이름의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는 기구들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인간에게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다는 미신을 심어주어 자연과 인간 사이에 적대관계를 빚어냈다.

이제는 누구에게도 옛날처럼 게으름을 피울 인간으로서의 특권이 주어져 있지 않다. 뛰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먹고살기에 너무 바빠서 그들에게는 이웃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시간도, 생각의 실타래를 풀어낼 시간도, 삶의 참뜻을 파헤칠 시간도 없다.

현대인은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도록 태어나자마자 틀 속에 집어넣어진다. 젖먹이 음식의 차림에서부터 시작해서 학교 가기 전에 어떤 것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이른바 ‘배움’이라고 일컬어지는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부지런 피우기를 대학에 다닐 때까지 우격다짐으로 머릿속에 집어넣어야 하고, 그러고 나면 군대, 직장 은퇴를 거쳐서 왜,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모르는 채 시체실에서 무덤으로 옮겨진다.

그래도 옛날에 비해서 현대가 살기 좋은 세상이라는 넋 빠진 소리는 하지 마라. 여름에 아이스크림을 먹고 겨울에 수박을 먹는 것을 행복이라고 부르지 마라. 도시화되어가는 현대 사회가 계절 감각을 잃어감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

사계절이 주어진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계절 감각의 상실은 곧 뱀이나 곰이 겨울잠을 잃음과 무엇이 다르랴. 봄철에 뿌려야 할 씨앗을 여름철에 뿌려도 틀림없이 자라서 열매를 맺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은 싹이 트지 않는 열매가 된다. 사람이라고 해서 왜 계절이 없겠느냐? 게으름을 피울 때에 부지런을 피우는 것은 마치 때가 아닌 때에 씨를 뿌림과 다름이 없다.

역사상에 게으른 민족이 남을 해치고 전쟁을 일으킨 예를 보았느냐? 게으름의 자유를 즐기는 사람이 욕망에 사로잡힌 예를 보았느냐? 양지쪽의 통 속에서 이를 잡고 있던 디오게네스와 세계를 정복할 야망에 불타 있던 알렉산드로스 중에서 누가 더 행복했고, 누가 더 착했으며, 누가 더 문화를 낳는 어머니 구실을 크게 했더냐?

착하고 성실하라고 하면서 부지런하라고 함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모순이냐? 부지런함이 미덕인 사회에서는 착함과 성실함은 이미 미덕이 아니다. 부지런함은 곧 생산성을 뜻하고, 생산성은 효율을 뜻하며, 효율은 경쟁이라는 자로 재어진다. 그런데 착함과 성실함은 경쟁과는 적대관계에 있는 협조라는 자로 재어지는 특성이다. 100미터를 맨 앞장서서 뛰겠다고 마음먹는 놈에게 어찌 뒤떨어지는 놈들을 돌볼 마음이 있겠느냐? 부지런한 자들의 천국에는 황혼이 없다. 밤이 없다. 따라서 부지런한 자들의 천국에서는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깃을 펼치지 못한다.

부지런한 놈과 게으른 놈의 차이는, 부지런한 놈이 겨울철에 비닐하우스에서 수박을 키워내느라고 애쓸 때에 게으른 놈은 동네 사랑방에서 지난여름의 수박 맛을 아쉬워하며 벗들과 내년에 즐길 수박화채에 대해서 입맛 돋우는 이야기를 나눔에 있으며, 부지런한 놈이 20년 뒤에 굴러 들어올 엄청난 재산을 꿈꾸며 나무를 심을 때에 게으른 놈은 숲속에서 들릴 새소리와 그 안에서 벌어질 토끼 사냥을 꿈꾸며 나무를 심는다는 데에 있다.

현대인아, 너는 왜 뛰면서 생각하느냐? 어느 주인이 너를 그렇게 몰아대느냐? 어떤 무서운 괴물이 네 뒤를 쫓고 있느냐? 너는 바로 멸망을 향해서 뛰고, 죽음을 향해서 뛰는 것이 아니냐? 어차피 죽음의 문턱에 이르는 것이 사람의 숙명이면, 게으르게 건들거리면서 그 문턱에 가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느냐? 때 아닌 씨앗을 뿌려 쭉정이만 있는 낟알을 거두는 것보다 때에 맞는 씨를 뿌려 영근 낟알을 거두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

현대인아, 밤이다. 부지런 그만 피우고, 우리 풀숲에 누워 별을 헤아리자. 그리고 올빼미가 깃을 펴기를 기다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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